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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세기 고려와 원제국의 ‘탐라(제주) 정책’

분야별정보 > 역사 > 제주사일반



고려는 국초 탐라와의 관계를 단계적으로 강화해 갔다. 현지세력을 포섭한후 현령을 설치했고, 타지역에 비해 높은 위상의 외관 및 안무사 또한 파견했다. 탐라와의 경제적 교류도 그에 조응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활발해졌다. 탐라인들의 내륙 방문양상은 단순 방물진상에서 송상형 방문교역 형태로 진화해 갔다.

 이후 고려정부는 13세기 전·중반 탐라현을 제주목으로까지 격상시켰지만, 그체제가 정착되기도 전에 몽골침공을 겪었다. 게다가 탐라 현지의 피해는 강화(講和) 이후에 더욱 극심해졌으니, 삼별초의 지배를 받은 데 이어 원제국정부에의해 일본정벌 준비에까지 동원됐기 때문이었다. 원제국은 한걸음 더 나아가 탐라를 교통요충·교역거점으로까지 인식, 다루가치를 파견해 탐라를 한반도 내륙(전라도) 및 중국 연안(수역)과 연결시켰다. 탐라권역내에서 유통되는 물자들을징구하는 한편으로, 교역거점으로서의 탐라현지를 동요시킬 수 있는 변수들을제거해 갔다.원제국의 이러한 탐라정책에 직면한 고려정부는 인력과 자산의 추가유출을막는 소극적 대응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원제국정부가 내부정책의 변화로 돌연 탐라를 고려에 돌려주면서(1294), 고려정부의 탐라정책 또한 재개될 계기를 맞았다. 그러나 고려는 현상유지 차원에서 1290년대 후반 탐라의 물산을정부중개형식으로 원제국에 빈번하게 방물로 바치기 시작했고, 원제국정부는 이로 인해 탐라의 물산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됐다. 지역경제기구로서의 ‘총관부’를탐라에 설치하려 한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고려정부는 총관부의 성격을 파악한 후 그에 극력 반대하면서, 절충안으로서군민만호부의 설치를 요구해 관철시켰다. 그리고는 그에 대응하여 탐라에 대한관리를 강화했는데, 그 방식이 이전과는 달랐음이 주목된다. 14세기 전반 충선왕의 경우 [원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탐라와 내륙의 연결성을 강화했고(승나주도 강화), 탐라의 외관들에 시달리던 [몽골엽호를 비롯한] 탐라내 경제주체들을 보호하였다. 반면 14세기 후반 공민왕의 경우, 기씨세력 척결과정에서 탐라에 만큼은 (외관적 성격이 강했던 군관인) ‘순무사’를 파견해 탐라현지에 대한 관리를강화했고, 자신이 임명한 만호(萬戶)와 목사(牧使)들로 하여금 몽골 목호(牧胡) 들을 견제케 함으로써 탐라의 마필자원에 대한 고려정부의 장악력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유형
논문
학문분야
역사 > 제주사일반
생산연도
2017
저자명
이강한
소장처
KCI
조회
28
첨부파일
13~14세기 고려와 원제국의 ‘탐라(제주) 정책’.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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