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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 제주목: 제주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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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2년(숙종 28) 11월 15일, 제주읍성에서 성정군의 조련과 제반사항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가중군 이항, 성장 4명, 치총 2명, 민호 7,319호, 전답 3,357결, 성정군 1.236명, 창고의 곡식 30,040여 석, 향교의 제기·제복·서책, 군기(軍器) 등을 일일이 점검하고 있다.

 당시 제주목의 편제는 읍 3리, 동면 34리, 서면 53리, 남면 5리 등 3면 95리다.

 일반적으로 지방 관아의 소재지를 읍치(邑治)라고 한다. 읍치의 주위는 대개 성곽으로 둘러있고 그 안에 거의 모든 관아 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이렇게 행정적인 목적으로 축성된 성곽을 읍성이라고 한다.

 이 그림에는 관덕정, 객관, 옥, 향교, 서원의 위치, 그리고 서과원, 중과원, 남과원, 북과원, 별과원의 위치 등 제주읍성 안의 관아건물의 위치가 상세하게 표기되어 있어 당시 읍성 안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제주읍성 밖 남쪽에는 모흥혈, 연무정, 사직단이 표시되어 있다.

제주읍성 이야기

 고려 말부터 출몰하기 시작한 왜구는 남해안은 물론 연안항로를 따라 서해안과 중국에까지 진출했다. 그 길목에 있는 제주는 왜구에 몹시 시달려야 했다. 고려 말부터 조선 18세기 까지 제주에 왜구가 침범한 횟수는 무려 50여 차례나 된다. 더불어 제주는 철저한 방어체제를 갖추고 있었는데, 읍성들 역시 방어목적을 겸한 읍치의 성이었다. 제주읍성은 탐라국 때의 도성(都城)을 계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제주시 관덕정 서쪽에 있는 '무근성'이란 곳이 그 도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성에는 보통 옹성, 해자, 여장 등의 부대시설이 갖추어진다. 조선 초기의 제주읍성은 현재 제주시 동쪽의 산지천과 서쪽의 병문천을 해자로 이용해 그 안쪽으로 성을 쌓았었다. 1555년(명종 10)에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1천여 명의 왜구가 침입했는데, 지금의 동문로터리와 사라봉 사이인 제주성 동쪽 높은 능선에 결집해 성안을 훤히 들여다보며 공격하는 바람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김수문 목사가 비장한 각오로 70명의 결사대를 조직해 적진으로 돌격시켜 적을 격파해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565년(명종 25) 곽흘 목사가 동성을 가락천 밖으로 늘려 쌓았다. 을묘년의 고통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성 안에 우물이 없어 백성들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산지천과 가락천이 제주읍성 안으로 들어오게 됐다.

 확장된 성담이 산지천 위로 지나가게 되자 남쪽과 북쪽 두 곳에 수구(水口)가 만들어졌다. 1599년(선조 32) 성윤문 목사가 성 굽과 높이의 확장공사를 하면서 수구 위에 건물을 지었다. 남쪽의 것을 '제이각(制夷閣)', 북쪽의 것을 '죽서루'라고 했는데, 제이각을 남쪽에 있다고 해서 흔히 '남수각'이라 불렀다. 남수각이라는 지명은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다.

 읍성을 동쪽으로 확대한 뒤 큰 비가 올 때마다 산지천이 자주 범람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1780년(정조 4) 김영수 목사가 옛 성터를 따라 간성(間成)을 쌓았다. 1847년(헌종 13)에는 이의식 목사가 성을 북쪽으로 좀 더 늘렸다. 제주의 상징물로 자리 잡은 돌하르방은 바로 제주읍성의 성문을 지키던 수문장이었다.

돌하르방은 동문, 서문, 남문의 성문 진입로에 각 8기씩, 모두 24기가 있었다. 한말까지 유지되었던 제주읍성은 일제강점기에 내려진 읍성철폐령으로 차례차례 헐려버렸다. 1925년부터 1928년 사이에 산지항 축항공사 과정에서 읍성을 대부분 헐어 바다를 매립하는데 써버렸다.

 제주읍성은 오현단 북쪽과 가락천 동쪽 일부만 그런대로 보존되어 있다. 지금 보존되어 있는 격대 가운데 2개는 원형대로 잘 남아있어 옛 제주사람들의 축성법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주성지는 1971년 8월 26일 제주기념물 3호로 지정되었다.

 

제주목관아 이야기

 고고대 탐라국 때부터 관아터였던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제주목의 관아들이 들어서 있던 제주읍의 중심지였다. 제주목 관아건물이 모두 불에 타버리자, 1435년 최해산 목사가 영청(營廳)인 홍화각을 건립하면서 종루, 침실, 욕실, 독서방, 금당(琴堂), 정당(政堂), 약고(藥庫), 낭사(廊舍), 영고(營庫)등 모두 206칸의 관아건물을 새롭게 세웠다. 이때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관아건물이 서로 닿지 않도록 짓고, 또 담장을 쌓았다.

 당시 죄수와 번(番)을 서는 사람들을 동원해 공사를 했는데, 건물 재료는 도내 무너진 사찰의 재목과 기와를 이용했다고 한다. 현재 문헌사료로 추정할 수 있는 관아건물의 골격은 이 때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뒤로 내내 중·개축(重·改築)이 이루어졌다.

 제주목관아 시설은 관덕정을 중심으로 북쪽 구역(현 복원지)의 건물을 상아(上衙)라 했고 남쪽 구역의 건물을 이아(二衙)라고 했다.

 북쪽에는 궁궐을 향해 배례하던 영주관을 중심으로 영청인 홍화각, 동헌(목사의 집무실)인 연희각, 동헌의 외대문인 종루 그리고 망경루, 애매헌, 귤림당 등이 들어서 있었고, 남쪽에는 찬주헌(판관의 집무실), 향청, 작청, 장청, 공수청, 옥, 관노방 등의 관아시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목관아 시설들은 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관덕정만 빼고 모두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에는 제주도청(島廳)이, 해방 직후에는 민군청정이, 1946년 제주도제(道制) 실시 이후에는 제주도청(道廳)이 들어섬으로써 제주역사의 심장부 역할을 했다.

 1991년, '목관아 원형 복원사업'을 위한 목관아지 북쪽 구역의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그 결과 문헌상에 나타난 중심건물인 홍화각, 연희각, 우연당, 귤림당 등의 건물터와 유구(遺構)가 확인되고 유물(遺物)도 출토되었다. 1993년 3월 30일에 제주목 관아지 일대가 국가사적 제380호로 지정되었다.

 그 뒤 '탐라순력도'와 '탐라방영총람(耽羅防營總覽)' 등 당시 문헌(文獻)과 향토사, 문화 관련 전문가들의 고증과 자문을 통해 관덕정 북쪽 구역 관아 시설물 복원기본설계를 마쳤다.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초석과 기단석 등을 토대로 1999년 9월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해 2002년 12월에 연희각, 홍화각, 우연당, 영주협당, 귤림당, 외대문, 중대문 등의 목관아 건물들의 복원이 완료됐다. 이 공사에 들어간 5만 여장의 기와는 모두 제주시민들의 헌와로 이루어져 목관아 복원사업을 더욱 뜻 깊게 했다.

유형
고문헌
학문분야
역사 > 제주사일반
생산연도
1703
저자명
제주시 제주목 관아
소장처
제주목 관아
조회
113
첨부파일
탐라순력도_제주목_제주조점.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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