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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호적자료를 통해 본 鮑作의 사회적 지위

분야별정보 > 역사 > 사회



 

역사민속학 제29호

본고는 조선시대 ‘전복을 채취하는 남자’로 일컬어지며 제주도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개척해 나간‘鮑作人’의 존재양태 및 사회적 지위를 살펴봄으로써 당시의 제주도 사회․경제상을 모색해 보고자하였다. 제주도는 예로부터 “地瘠民貧 惟以水道 經記謀生”라 하여 바다에서의 해양활동은 제주도사람들의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여기서 채취한 해산물을 육지 물품과의 교환․매매를 통해 생명을 유지하여 왔다. 이렇듯 제주도민의 삶에 있어서 바다는 한시도 떼어져서 생각할 수없는 불가분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으며,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간에 언제 불어 닥칠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생계를 위해 바다로 향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제주도 사람들의 생 한 가운데 거친 파도와 함께 그 이름이 사라져간 포작인이 있었으며, 이들 포작인의 실상을 戶籍資料를 통해 고찰하고자 한다. 그 가운데서도 현재 제주도 대정현 지역에남아 있는 호적자료가 포작인들의 사회적 지위 및 신분변동 양상의 파악을 가능케 함으로써 과거 ‘수탈과 통제의 대상’으로만 인식되어왔던 그들을 새롭게 재조명 해보고자 하였다. 18세기 후반 제주도 대정현 호적자료 통해 분석한 결과, 六苦役에 해당하는 良役인 포작역은 公 奴婢로 인해 충당되고 있었으며 이들 공노비는 禮賓寺, 典醫監, 仁順府, 內資寺, 內贍寺, 內需司의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寺奴婢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위의 포작인들은 보편적으로 동일한 마을 내에서의 신분내혼 양상과 賤賤相婚의 혼인양태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후 포작인은 格軍 등으로의 직역변동이 이루어지는 등 점차 소멸되어 가고 있었으며, 사후에 그 자손들에 의해서도 포작인을 비롯한 四祖의 직역을 冒錄․冒稱․직역을 기재하지 않는 등의 방법을 통해 신분적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음을 살필 수가 있었다.

유형
논문
학문분야
역사 > 사회
생산연도
2009
저자명
김나영
소장처
KCI
조회
10
첨부파일
조선후기 호적자료를 통해 본 鮑作의 사회적 지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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