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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학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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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진대석 마애비

분야별정보 > 역사 > 문화



진대석(秦大石)

소재지 :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

규격 : 높이 220 너비 130 두께 100

정려(복호)연도 : 1634년(인조 12)

건립연도 : 2003년 11월

비문(전면) : 孝子 秦大碩(마애명)

문헌(수록) : 탐라지(이원진), 효열록(김영락), 탐라지초본(이원조), 탐라기년(김석익),보탐라지(담수계).

문헌(내용) : 효열록.

본주 광령리(光令里) 사람이다. 보병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어머니는 각기병이 있어서 앉거나 설 때에는 남에게 의지하여야만 하였다. 대석이 번을 서기 위해 들어갈 때에는 그의 어머니를 업고 성 안까지 와서 쌀을 구걸하여 공양하였고, 번을 서고 물러날 때에는 업고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반드시 먹을 것을 마련해 드렸다. 처자를 두면 모친을 공양하는데 전심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장가를 들지 않고 홀로 살면서 손수 밥을 지어 올렸다. 정설이 있으며, 읍지에 실려 있다.

 

해설 표석 : 효자문(孝子門)

효자 진대석(秦大碩)은 조선조 인조 때 사람으로 기록에 의하면 당시 군교(軍校)에 복무하였다. 일찍이 조실부(早失父)하고 각병(脚病)으로 홀로 고생하시는 모친을 업고 다니면서 극진히 효성을 다하였으며, 또한 처자식이 있으면 효를 못 다할까 하여 끝내 독신으로 살았기에 무후(無後)하였으며 이 사실을 나라에서도 알고 인조 12년(1634년)에 효자문을 하사하였다. 시대 흐름에 따라 효자문은 소실되고 없어졌으니 이를 안타까이 여긴 유학자 진옹(震翁) 이응호(李膺鎬)씨가 노변(路邊) 자연석에 효자 진대석이라 각하여 세웠는데 1998년 서부관광도로 확장에 따라 이 표석마저 소멸하게 되니 이를 보완 재 건수(再 建竪)하여 후세만대에 길이 보전하고자 함이다. (우측면) 2003년 11월 일 광령1리민 일동

유형
사진
학문분야
역사 > 문화
생산연도
2016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25
첨부파일
효1-1 효자 진대석 마애비(효자 진대석)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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