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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학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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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서종 정려비

분야별정보 > 역사 > 문화



양서종(梁瑞宗)

소재지 :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규격(cm) : 높이 90 너비 47.5 두께 16

정려(복호)연도 : 1906년(광무 10, 완문).

건립연도 : 1910년.

비문(전면) : 孝子梁瑞宗之閭

비문(우측면) : 隆熙 四年 庚戌 長孫 應柱 謹竪

비문(후면) : 夫恪守倫綱死生一致 以至閭基之卓行 則自官褒揚 惟國命旌 古今大典也 惟我祖諸瑞宗公 年甫十一 父歿母存 亦無受敎 而克恪孝道 昏晨定省 冬夏溫淸 恐不及年當八十 以病臨終 斷指■■ 有■復甦 加生九年 如是卓行 豈非出天而然乎 凡諸事蹟 自不泯沒 面洞■報營府 完文及御史題 音班班相因然 旌表一節有天感 而非人私也 ■于光武十年 自京約所 收單稟告上部 乃修三綱錄 班賜表揚 莫非聖上加天之德 豈不感祝哉

비문(우측면) 해석 : 융희 4년 경술(1910) 장손 응주 삼가 건립.

비문(후면) 해석 : 삼강오륜을 공손하게 준수하여 삶과 죽음이 서로 같아, 정려의 터에 이르게 된 뛰어난 행적으로 관가에서 포양하고 나라의 명으로 정려함은 예부터 지금까지의 큰 법이다. 할아버지는 열한 살 때 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계셔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지만 효도를 다하며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고 자리를 깔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하며 나이 80을 못 채울까 염려하였다. 병으로 임종을 맞이하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으니 다시 살아나 9년을 더 살았다. 이와 같은 뛰어난 행실이 어찌 천성으로 나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여러 사적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게 고을에서 영부에 보고하니 완문 및 어사의 제음이 명백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정표를 한 한마디는 하늘이 감탄한 것이지 사람이 사사로이 한 것이 아니다. 광무 10년(1906) 경약소에서 수단을 상부에 품하여 보고하니 이에 삼강록에 작성하고 표양하도록 반포하여 내렸다. 성상께서 하늘의 덕에 더해 준 것이라, 어찌 감축하지 않으랴.

유형
사진
학문분야
역사 > 문화
생산연도
2016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17
첨부파일
사진교체1 본문5단원효자19번 양서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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