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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 김씨(처사김공창은지처효열경주김씨지려)

분야별정보 > 역사 > 문화



김씨, 김창은(金昌銀) 처

소재지 : 서귀포시 중문동

비문(전면) : 處士金公昌銀之妻孝烈慶州金氏之閭

비문(후면) : 嗚呼 烈哉 夫媍人之儀敬貞者也 順以事人易 死以從人難矣 烈婦金氏慶州后人南彩之女也 年十八歸于羅州后人金昌銀之家 而同居七年 孝事祖舅姑及舅姑 而甘旨適口一念汲汲 則聞之見之者 莫不稱嘆矣 及其夫病篤也 饘粥必親煮 湯藥必自嘗 痛若在己 祝天禱神願以身代 而天賦有限 病未脫危 戊申三月二十八日因遂致命 則哀毁罔措 四月初二日出殯返魂之後 抱四歲幼兒萬衡而泣曰 汝幸存家繼 我從下急矣 潛入房中 以喪帶自縊 捨生取義 烈節于雲 貞心貫日 乃有卓異之孝節 而及其葬日 縣監張公旣據里牒 而癸其灵 牧使李公又因民狀 而復其戶 甲寅御史沈公啓達天朝 以暢褒揚典 使島民觀感慕 郊旌表焉 檀紀四二二一年戊子春曾孫尙福改建 而雨洗風磨字 泐未著 故以令 檀紀四二九六年癸卯春 不肖玄孫文植涕泣改建 五代孫奉春東弼 贊助者李基善

비문(후면) 해석 : 아아! 지조가 굳구나. 부인의 예의가 공경스럽고 정숙한 사람은 순종해서 남을 섬기기가 쉽고, 죽어서 남을 따르기가 어렵다. 열부 김씨는 경주 후예 남채의 딸이다. 나이 18세에 나주 후인 김창은의 집에 시집가서 7년을 같이 살면서 조부모 및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며, 맛있는 음식을 입에 맞게 한결 같은 마음으로 바삐하니, 듣고 보는 사람들이 칭찬하고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죽은 반드시 손수 끓이고 탕약은 반드시 스스로 맛보며 아픔이 마치 자기에게 있는 듯이 하늘과 신에게 자신으로 대신해 달라고 기도하고 소원하였다. 하늘이 준 생명은 한이 있는지 병의 위험한 고비를 벗어나지 못하고 무신년(1788) 3월 28일 드디어 죽음에 다다라 슬픔으로 몸이 상해 조치할 수가 없었다. 4월 2일 상여가 나가고 혼백상이 돌아온 후에 4살 어린 아이 만형을 안고 울면서 말하기를 “너는 남아 집안을 잇기 바란다. 나는 남편을 따라 급히 가겠다.”하고 몰래 방안에 들어가 상복 끈으로 스스로 목을 매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였다. 구름에 있는 굳은 절개이며 곧은 마음은 태양을 가로 막으니 바로 남다르게 뛰어난 효절을 지녔던 것이다. 장사지내는 날에 현감 장공(張漢喆)이 이윽고 마을에서 올린 첩보에 의거하여 영혼을 헤아렸고, 목사 이공(李喆模)도 민장에 따라 복호를 하였다. 갑인년(1794)에 어사 심공(沈樂洙)이 조정에 장계를 드려 포양의 법으로 표창하며, 도민들이 살펴보고 감격하고 사모하도록 교외에 정표하였다. 단기 4221년 무자년(1888) 봄에 증손 상복이 개건하였는데, 비바람에 글자가 닳아져 새긴 글자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단기 4296년 계묘년(1963) 봄에 불초 현손 문식과 5대손 봉춘, 동필이 눈물 흘리며 개건하고, 찬조자는 이기선이다.

유형
사진
학문분야
역사 > 문화
생산연도
2016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19
첨부파일
열1-18 열녀 김씨(처사김공창은지처효열경주김씨지려) 서귀포시 중문동.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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