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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학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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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 고씨(사인강명봉처고씨효열지려)

분야별정보 > 역사 > 문화



고씨(高氏), 강명봉(姜明鳳) 처.

소재지 : 제주시 봉개동.

건립연도 : 1935년

비문(좌측면) 해석 : 옛날 채나라 사람의 한 아내는 송나라 사람의 딸로서 시집간 후에 남편이 나쁜 병에 걸렸는데, 그의 부모가 개가시키려고 하니 딸이 말하기를 “남편의 불행은 곧 첩의 불행이며 하물며 시집간 사람의 도리로서 한 번 결혼을 하면 개가하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하며 끝내 듣지 아니하고 정성껏 남편을 섬기며 병을 치료하니 다른 사람이 아닌 회암(晦庵, 朱子) 선생께서 만세의 부녀자로 하여금 본받도록 소학(小學) 책에 수록하였다. 오늘날 제주 봉개리에 사는 고씨의 뛰어난 행실에서 떳떳한 성품을 더욱 보인 것은 고금과 다르지 않다. 고씨는

비문(후면) 해석 : 탐라의 귀한 집안으로서 증조부의 이름은 익노(益老)요, 할아버지의 이름은 수록(受祿), 아버지의 이름은 응례(應禮)이며 가선대부이다. 어머니는 김해김씨 종영(宗頴)의 따님이다. 고씨는 1876년 6월 21일생이며, 어려서부터 우아하고 온순하여 스스로 정숙하니 자못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6세에 진주 강씨 명봉에게 시집갔는데 결혼한 지 겨우 3개월 만에 남편이 중풍으로 전신마비가 되었다. 앉고 일어서는 것을 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고씨는 정성껏 온 힘을 다하여 백방으로 치료하여 40년을 하루 같이 시중들어 잘 봉양하였고 시부모님의 말씀에 늘 순종하고 입에 맞는 음식과 몸에 좋다면 어떤 것도 가리지 않고 편히 모셔 극진히 봉양하면서 조상의 제사를 경건히 받들고 근검절약으로 재산을 일으키니 이 미담이 향청에서 천거하고 관에서 포상하여 드디어 효열록(孝烈錄)에 올렸다. 또한 어린 후학을 가르치는 데에도 남다른 뜻이 있어 ‘동보서숙(東普書塾)’을 세워 가르치려 하나 설립 자금이 어렵다는 소문을 듣고 선뜻 300여 원을 기부하였다. 가만히 생각하면 정열(貞烈)과 효행(孝行)은 채나라 사람의 아내와 같으나 사재를 털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채나라 부인에게서 듣지 못하였으니 어찌 이와 다르지 않으랴. 마을 사람들과 친척들이

비문(우측면) 해석 : 모두 말하기를 명성을 세우고 오늘과 뒷날 남의 부인이 되는 사람들을 격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마을 앞 네거리에 비석을 세우게 되니, 바다 건너 사람을 보내 택승(宅承)에게 비 음기를 구하기에 택승은 본래 제주 사람으로서 정의상 사람이 미천하고 글이 난잡하다고 사양할 수도 없어 그 공적을 대략 위와 같이 썼다.

을해년(1935) 음력 12월 죽산(竹山) 안택승(安宅承) 글을 지음.

유형
사진
학문분야
역사 > 문화
생산연도
2016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17
첨부파일
열2-4 열녀 고씨(사인강명봉처고씨효열지려) 제주시 봉개동.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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