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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학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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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의사비(제주대정삼의사비)

분야별정보 > 역사 > 문화



삼의사(三義士,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소재지 :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건립연도 : 1997년 4월 20일

비문(전면) : 濟州大靜三義士碑

비문(후면) :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 1899년 濟州에 포교를 시작한 天主敎는 당시 국제적 세력이 우세했던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그때까지 민간신앙에 의지해 살아왔던 도민의 정서를 무시한 데다 봉세관과 심지어 무뢰배들까지 합세하여 그 폐단이 심하였다. 신당의 신목을 베어내고 제사를 금했으며 심지어 私刑을 멋대로 하여 성소 경내에서 사람이 죽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에 大靜 고을을 중심으로 일어난 도민 세력인 商務會는 이 같은 상황을 진정하기 위하여 城內로 가던 중 지금의 翰林邑인 明月鎭에서 주장인 吳大鉉이 천주교 측에 체포됨으로 그 뜻마저 좌절되고 만다. 이에 분기한 李在守, 姜遇伯 등은 이진으로 나누어 성을 돌며 민병을 규합하고 교도들을 붙잡으니 민란으로 치닫게 된 경위가 이러했다. 규합한 민병 수천 명이 제주시 외곽 黃蛇平에 집결하여 수차례 접전 끝에 제주성을 함락하니 1901년 5월 28일의 일이었따. 이미 입은 피해와 억울함으로 분노한 민병들은 觀德亭 마당에서 천주교도 수백 명을 살상하니 무리한 포교가 빚은 큰 비극이었다. 천주교 측의 제보로 프랑스 함대가 출동하였으며, 조선 조정에서도 察理御使 黃耆淵이 이끄는 군대가 진입해와 난은 진압되고 세 장두는 붙잡혀 압송되어 재판과정을 거친 후에 처형되었다. 장두들은 끝까지 의연하게 제주 남아의 기개를 보였으며, 그들의 시신은 서울 靑坡洞 만리재에 묻었다고 전해 오나 거두지 못하였다. 대정은 본시 의기남아의 고장으로 조선후기 이곳은 민중봉기의 진원지가 되어왔는데, 1801년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그의 아내 丁蘭珠가 유배되어 온 후 딱 백년 만에 일어난 李在守亂은 후세에 암시하는 바가 자못 크다. 1961년 辛丑에 향민들이 정성을 모아 濟州大靜郡三義士碑를 대정고을 홍살문 거리에 세웠던 것이 도로 확장 등 사정으로 옮겨 다니며 마모되고 초라하여 이제 여기 대정고을 청년들이 새 단장으로 비를 세워 후세에 기리고자 한다.

1997년 4월 20일 대정고을연합청년회 세움

문헌(수록) : 탐라기년(김석익), 증보탐라지(담수계).

유형
사진
학문분야
역사 > 문화
생산연도
2016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38
첨부파일
충의4 삼의사비(제주대정삼의사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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