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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비(행수내의녀김만덕지묘)

분야별정보 > 역사 > 문화



김만덕(金萬德)

소재지 : 제주시 건입동 모충사내 전시관 서쪽

정려(복호)연도 : 1795년(정조 19)

김만덕 묘비 :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4호(2007년 1월 24일 지정).

비문(전면) : 行首內醫女金萬德之墓

비문(후면) : 金萬德本金海 卽耽羅良家女也 幼而失恃 零丁貧苦 長而靡曼 托跡敎坊 縮衣損食 貲産滋大 歲在正宗祖乙卯 島人大飢 能傾財運穀 活命甚衆 牧伯賢之以聞 上問何所欲 對曰 願見京華金剛之勝而已 特命縣次續食 充內醫女寵頒 便蕃因給舖馬 遍覽萬二千峰 及其還鄕 大夫皆 章立傳 雖古賢媛 盖未嘗有 七旬顔髮 彷彿仙釋 重瞳炯澈 但天道無心 惜乎無兒 然養孫時采出自同氣 克遵遺志 永春香火 亦復奚憾 生于元陵己未 終于當宁壬申 十月卄二日 以翌月 窆于竝園旨 甲坐之原 上之卽位十二年 十一月二十一日立

비문(후면) 해석 : 김만덕의 본관은 김해요, 곧 탐라 양가의 딸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이 가난하여 고생하였다. 자라서는 약하고 부드러워 교방에 의탁하였는데, 옷을 동여매고 식비를 줄여서 재산을 크게 불렸다. 정조 을묘년(1795)에 도민이 크게 굶주리자 재산을 다 내어 놓아 육지에서 곡식을 사들여 목숨을 살린 일이 매우 많았다. 목사가 이 어진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매, 왕께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번화한 서울과 금강산의 명승을 보는 것을 원할 뿐이라고 하였다. (왕은) 특별히 명하여 역로(驛路)에 있는 각 고을이 차례로 음식을 공급케 하였고, 내의녀(內醫女)로 삼아 은총을 베풀었다. 가는 곳마다 역말을 지급케 하여 금강산 1만 2천봉을 두루 유람할 수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적에는 대부들이 모두 전별의 글로 전기를 지어 주었다. 비록 옛날의 현명한 여자라 하더라도 아직 이런 일은 없었다. 칠순에도 얼굴과 머리가 신선과 부처를 방불케 하였고 두 겹 눈동자가 빛나고 맑았다. 다만 하늘이 무심하여 아깝게도 자식이 없었다. 그러나 양손 시채(時采)로 동기에서 후계를 삼아 생전의 뜻을 준수하게 되어 영원히 향불을 받들었는데, 또다시 무엇을 한하랴. 원릉(元陵, 영조) 기미년(1739)에 태어나고 순조 임신년(1812) 10월 22일에 임종하니, 다음 달에 ‘병원지(竝園旨, 고으니모르)’에 장사지냈다. 순조 12년 11월 21일 세움.

문헌(수록) : 탐라지초본(이원조), 탐라기년(김석익), 증보탐라지(담수계).

유형
사진
학문분야
역사 > 문화
생산연도
2016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29
첨부파일
충의6 김만덕비(행수내의녀김만덕지묘) 제주시 건입동 모충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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