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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학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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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송인명 삼부자비(충효송경천인명의명삼부자지려)

분야별정보 > 역사 > 문화



송경천(宋擎天), 송인명(宋仁明), 송의명(宋義明) 삼부자

소재지 : 제주시 애월읍 금성리.

정려(복호)연도 : 복호(1822, 순조 22), 정려(1868, 고종 5)

비문(전면) : 忠孝宋擎天仁明義明(三父子)之閭

비문(후면) : 忠孝全於一門 公之三父子也 公礪山人 府院君正嘉 諱瑞二十二世孫也 正宗朝甲寅年 年事大無 蒙■■天朝賑恤之澤 渾家賴出公徵■ 欲銀涓■有志無■ 當魚脯進上之節 以素願挺身 同乘二子於同舟 陪持■■■■滿於中洋 二旬幾次■■至■■危坐束■■■存■■而已 二子侍側 從■■漂泊於蘇州府境 ■■■ 或負父■■■里■■■■■■■一如■■面里民人等報一所■■■■■■■■■御史 褒揚于上列聖■■■■■■■■■■■■■爲公之榮哉 戊辰二月日 ■旌閭

비문(후면) 해석 : 충신과 효자가 한 집안에 온전한 것은 공의 삼부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공은 여산인(礪山人)으로 부원군 정가(正嘉), 이름 서(瑞)의 22세손이다. 정조 갑인년(1794)의 농사가 큰 흉년이 들었을 때, 나라에서 곤궁한 백성을 구원해 주는 은택을 입어 온 집안 식구가 큰 일 없이 지내게 되었음을 생각하며 국은에 보답하고자 뜻을 품고 있던 차에 어포(魚脯) 진상의 계절을 당하여 본래의 소원대로 자진해서 한 배에 두 아들과 함께 타고 진상물품을 가지고 출륙하였는데 갑자기 중양(中洋)에서 태풍을 만나 표류한 지 스무 날에 몇 차례 위험한 고비를 만났으나 공은 옷깃을 바로하고 정좌하여 진상물을 동여매고 삼가는 마음이 극진하였다. 두 아들도 곁에서 모시면서 삼가 하느님께 구명을 축원하였는데, 소주부(蘇州府) 지경에 표박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공은 연로하여 마음을 가다듬었으나 불행히 봉황성에서 죽었으므로 형제는 아버지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혹은 메거나 혹은 업고서 산과 바다 만여 리를 돌아온 뒤 선영의 곁에 장사지내었다. 면과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이 사실을 알리니 본주 목사가 완문을 만들어 주었고 사림도 천거하여 철종 3년(1852)에 어사가 포양하였고 임금께 아뢰는 영광을 입었으니 찬란하게 빛나도다. 이는 어찌 한 개인으로서만이 아닌 모두의 영광이 아니랴.

문헌(수록) : 효열록(김영락).

유형
사진
학문분야
역사 > 문화
생산연도
2016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21
첨부파일
효1-3 효자 송인명 삼부자비(충효송경천인명의명삼부자지려) 제주시 애월읍 금성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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