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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後期 濟州道 甕器 硏究: 허벅을 중심으로

분야별정보 > 역사 > 문화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본 논문은 조선후기 제주도 옹기(甕器) 중 ‘허벅’을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물 운반용구였던 허벅은 내륙에 없는 독특한 용기로서 주로 민속학·사회학적 관점과 성형방법을 중심으로 현대 도자공예에서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미술사 분야에서는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으로 연구 또한 미진하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허벅의 기원과 유래를 밝히고, 가마의 입지조건과 종류, 생산과 유통, 허벅의 기능과 양식변화 등 조형분석을 통해 그 실상을 파악하여 제주도 옹기가 도자사의 한 갈래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기초를 다지는데 연구의 목적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해 먼저 허벅의 정의와 기원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써 제주도 옹기 중 허벅이 근대기 상수도시설이 구비되기 이전까지 물을 긷는데 가장 긴요했던 용기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즉, 허벅은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화산회토 지형인 제주도에서 비가 오면 물이 땅으로 빠져 해안가에서 물이 솟아나기 때문에 해안가에 형성된 용천수(湧泉水)나 봉천수(奉天水)가 있는 곳에 물을 길러 다니기 위해 구경은 좁고 어깨외경이 팽만한 대병(大甁) 형태로 제작된 운반용기였다. 물 긷는 용구는 18세기 초까지의 문헌기록을 통해 나무로 제작된 목통(木桶)을 사용하였고, 도기(陶器)는 사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18세기 후반(178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제주읍지(濟州邑誌)」 대정현지(大靜縣誌) 도로조(道路條)에 기록되어 있는 대정현 서쪽 5리 정도에 있는 가미수(茄味藪) 옹점(甕店)을 통해 18세기 중후반에 나무로 된 목통에서 도기로 대체되었음을 추론해 볼 수 있었다. 제주도에서 가마가 형성된 시기는 17세기 중반의 정황을 보여주는 1649년「홍화각중수기(弘化閣重修記)」에서 제주에는 기와를 제작할 수 있는 장인이 없어 바다 건너 가까운 읍에서 불러와야 한다고 한 것, 1660년「제주장수당기(濟州臧修堂記)」에서 기와는 도토(陶土)를 잘 구워서 이것을 쓰겠다고 했던 대목, 이익태(李益泰, 1633~1704)의 「지영록(知瀛錄)」에 수록된 1694년의 연무정 보수에 필요한 기와를 명월면의 옛 가마터에서 굽는데 그 근처의 하인(下人)들에게 일을 시키고 있었다는 내용 등을 통해 17세기 중후반이 되면서 기술의 유입과 습득으로 기와를 자체에서 만들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 1702~1703)의 「남환박물(南宦博物)」에서 도자기는 생산되지 않았다고 한 것처럼 18세기 초반까지는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가마가 일반적으로 분포되어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형
논문
학문분야
역사 > 문화
생산연도
2010
저자명
이경효
소장처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
조회
34
첨부파일
朝鮮後期 濟州道 甕器 硏究-허벅을 중심으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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