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의 公的 인식 및 서술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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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3일 당일 일어난 사건은 폭동, 무장봉기 등으로 신문에 보도되었다. 신문 매체가 갖는 공공성으로 인해 독자 대중들에게 4·3은 뚜렷이 공적인식으로 각인되었다. 이후 대중들은 이 사건 전반을 ‘4·3’이 들어간 명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단, ‘4·3’의 뒤에 붙는 명칭은 공적 인식의 변화를 사회가 수용하는 정도와 개인·공동체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불렸다.
제주학연구센터에서 수집한 소장자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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