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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초기 경비대와 무장대 협상 연구

분야별정보 > 역사 > 4.3



제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지금까지 4·3사건 초기 추진되었던 경비대와 무장대 간의 협상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 결과 지금 널리 알려진 사실에 일부 오류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즉 협상은 4월 28일이 아니라 4월 30일에 열렸다. 협상장소도 구억국민학교가 아니라 그보다 더 한라산 쪽 고지대에 있는 평범한 초가집이었다. 그리고 협상과 오라리 사건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협상의 추진 주체는 경비대를 중심으로 한 미군정 세력이었다. 협상은 진압군 측에서 제의했던 것이므로 엄밀한 의미로 말한다면 귀순 촉구협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무장대가 항복하지 않는 한 협상은 결렬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것이었다.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단선·단정거부 등을 주장하며 1948년 4월 3일 봉기를 함으로써 본격화된 무장 대립은 5·10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치열한 대립을 더해가고 있었다. 이미 많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미군정은 1948년 4월 17일 초기의 치안상황 판단을 변경하여 경비대 제9연대에게 진압명령을 내렸다. 1948년 4월 20일 경비대 제5연대의 1개 대대가 부산에서 제주도에 들어왔고 본격적인 강경진압이 전개되었다. 특히 5월 1일 메이데이를 계기로 강화될 수 있는 무장대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4월 27일부터 29일까지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펼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협상은 벌어진 것이었다.그러나 협상에 참가하거나 관계된 세력들은 각각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미군정과 무장대는 사실상 평화적인 해결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김익렬 중령은 평화롭게 사건을 해결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기고문』과 『유고록』 모두에서 그는 사건의 해결방법에서 유연한 태도를 일부 견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미군정에게는 효율적이지 않고 무능한 지휘자로 보였다. 김익렬에게는 경비대원 모집광고에서 보이는 ‘민족주의’적 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미군정의 강경진압 정책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익렬은 5월 6일 제9연대를 떠나 사령부로 전임 명령을 받음으로써 제주도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3개월 후 국제신문을 통해 협상의 내용을 상세하게 밝혔던 것이다.4·3사건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1988년 이후이다. 20여년의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4·3사건의 전개과정에 대하여 대부분은 밝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논문의 주제인 경비대와 무장대의 협상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밝혀진 것은 많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 판단의 가장 큰 이유는 4·3사건이 좌우익을 막론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던 사건이었고 미군정은 이미 남로당이 일으킨 봉기임을 알고 있던 상황에 굳이 방화사건을 조작하여야만 강경진압을 할 수 있었는가라는 의문이었다.연구과정에서 확인한 것은 역설적으로 협상의 당사자가 분명하지 않은 회고록을 남겼고 이것이 널리 알려졌던  

유형
논문
학문분야
역사 > 4.3
생산연도
2009
저자명
김용철
소장처
제주대학교 중앙도서관
조회
82
첨부파일
제주4.3사건 초기 경비대와 무장대 협상 연구 - A Study on Negotiations betweenthe Constabulary and the Militant Group in Jeju at the Beginning of the 4.3 Uprising.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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