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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부고씨 설치 향화 권선록

분야별정보 > 역사 > 인물



절부암과 신재우 판관

조천리에 거주하는 신재우는 소년시절이었는데, 제주향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이때 1853년 절부고씨의 열행이 도내에 알려지자 몹시 감동하였고, 정문이 세워지지 않음을 듣고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 과거에 낙방하던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소복한 여인이 나타나서 무슨 말을 할 듯 하다가 사라졌다. 이상히 생각한 그는 점장이에 문점을 했더니 “죄없이 죽었으니 저승에서 받아들여 주지 않고, 이승으로 나오려니 시신이어서 소생 못하여 헤매는 여인이다. 잘 모시면 좋은 일이 있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과거 공부를 하던 중 열려전을 읽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은 열려고씨였다. 약간의 제물을 마련하고 고씨의 무덤을 찾아가서 제사를 지냈다.

그 뒤 과거에 합격하여, 청암찰방으로 부임했다가 1866년 제주 판관으로 영전하여 해남을 출발하였는데, 파도가 높아서 진도에 들려 객사에서 잠을 자는데, 전에 현몽했던 여인이 나타나서 “ 첫닭이 울거든 곧 떠나라” 고 하는 것이었다. 잠을 깨니 첫 닭 우는 고리가 들리지 않는가, 사공을 깨워 배를 띄웠다.

제주 화북포구에 도착하자 태풍이 불어 닥친 것이다. 진도에서 물때를 맞추느라고 뒤늦게 출발한 타선들은 화탈도(관탈섬)까지 못 와서 파도에 휩쓸려 침몰되었다. 이를 눈앞에서 본 신재우는 절부의 보살핌에 감격하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1867년 그녀가 죽었던 나무 밑에 있는 바위에 ‘절부암’이라 새겼으며, 절부의 무덤을 크게 보토하고 산담을 두르고 표절비를 세웠다. 그 후에 두 번째의 대정군수로 도임시(1898)에는 오십량의 돈을 내놓고, 또 군소속 관원들의 지원금 합계 75량을 가지고 고산, 용수 양리에 각 37량 5전씩 나누어주며, 절부고씨의 묘제(열려제)를 지내게 해서 지금까지도 해매다 음력 3월 15일에 끊이지 않고 묘제를 지내고 있다.

유형
고문헌
학문분야
역사 > 인물
생산연도
1944
저자명
한경면 용수리사무소
소장처
한경면 용수리사무소
조회
142
첨부파일
절부고씨 설치 향화 권선록.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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