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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고득종(1388~1452)의 시문과 서예 연구

분야별정보 > 역사 > 인물



탐라문화 54호 

 이 논문은 제주 출신으로 조선 초기 독보적인 족적을 남긴 고득종의 문예를 서예사적으로 조명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

  제주도 서예사의 첫 머리를 장식해야 할 고득종의 서예가 갖는 중요도에 비해 그에 관한 연구는 미미하다. 게다가 그의 서풍도 송설체의 아류정도로 인식되어 있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 초기의 문화예술계가 안평대군과 신진사대부들의 주도하는 가운데 송설체가 풍미하는 환경에서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득종은 이러한 환경에서 그들과 함게 교유는 하되 시류에 흔들림 없이 고법을 견지하였다. 그의 후손이 편집한 영곡유고에서 그는 일관되게 위국애민의 선정을 주문함으로써 도학자적 이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서예에서 있어서도 당시 서단에 풍미하던 유려하고 연미한 송설체를 무조건 답습하기 보다는 오히려 당초 조맹부가 주창했던 위·진 고법의 본류에 천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방인의 한계를 극복한 고득종의 시서의 형성배경에는 탐라성주로서의 자존감과 토관자제로서 제주민에 대한 책임감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득종의 서예적 성취는 내면에 위국애민의 도학자적 시문과 화이부동으로 대변할 수 있는 고법의 천착이 표리를 이루어 서권기문자향을 이루고 있다.

  조선 초기 서예는 송설체의 풍미로 위·진고법이 일시 주류에서 벗어나지만 여전히 주목을 받고 있었으니 그 중심에 고득종 서예의 위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득종의 서맥이 조선 후기 한석봉으로 이어져 새로운 왕희지체가 부활하게 되는 가교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론해 본다. 

유형
논문
학문분야
역사 > 인물
생산연도
2017
저자명
오창림
소장처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조회
31
첨부파일
조선 초기 고득종(1388~1452)의 시문과 서예 연구_오창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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