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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濟海와 濟州백성의 ‘謀變’(1813) 다시보기

분야별정보 > 역사 > 인물



 탐라문화 34호​

 

이 소품은 국가권력의 이중 폭력에 대한 고발이다. 하나는 사건 현장의 주민 에게 가한 고문 폭력이고 또 하나는 이 고문의 결과로 날조된 허위 자백만을 사료로 잔존시키는, 역사 진실에 가하는 조작 폭력이다. 거의 2백 년 전 억울하 게 희생된 제주의 의협인, 양제해 ―글 모르는 데도 백성들이 따랐던, 사건 당시 풍헌이면서 평민 지도자였던 양제해― 의 복원과 해원에 주된 목적을 두었 다. 곁들여, 상찬계와 목사 주도의 추핵[심문]과정에서 장살(杖殺) 된 6명과 거 의 반병신이 되어버린 42명의 ‘반란죄인’에게도 그 역사적인 복원과 함께 구천 을 떠도는 혼령의 해원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사료에 접근하였다. 이 글은 1813년 초겨울 제주 아라 마을에서 백성과 양제해(1770~1813)가 모여 의론한 것이 등소(等訴)였지 변란(變亂)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당 시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던 서리들의 이권조직, 상찬계(相贊契)의 착취와 횡포를 연명으로 시정하려는 등소모의였다. 그것도 등소하기로 약속만 하고 헤 어진 뒤 고자질로 좌절된 등소미수사건 이었다. 상찬계는 즉각 꼭두각시 목사 를 앞세워 취회(聚會)하여 모의했던 그날, 저녁 즉각 장두 양제해를 체포하여 고문으로 죽여 버렸다. 이튿날 새벽의 일이었다. 목사는 모의 성격을 변란(謀 變) 그러니까 반란으로 둔갑시켜 보고하였다. 일년하고 반년 전 ‘홍경래난’의 그 악몽에 아직도 시달리고 있던 조정도 주저 없이 그 ‘모변’을 인정하고 말았 다. 상찬계와 목사는 이 군사반란의 모의를 입증하기 위해 <차례>에서 보이는 여러 사실을 왜곡 날조하여 조정을 현혹시켰다. 모병한 9백 명을 육지에서 구 입한 포․조총․화약으로 무장하여 제주․정의․대정 세 읍을 동시 공격 점령 하고 그곳 관장을 살해한 다음, 양제해가 도주(島主)가 되어 제주 별국(別國) 을 선포한다는 각본이었다. 고문의 피로 엮은 각본이었다. 이 모두가 거짓임이 드러났다. 이 비운의 양제해는 후에 제주 민중의 영웅으로 부활하였다. 지은이는 이 복원과 해원에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한 김익강(1753~ ? )과 이 강회(1789~ ? )에게 경의를 표한다. 「相贊契始末」은 두 분의 합작품으로, ‘모 변’의 주모자로 몰렸던 金의 정직하고 정확한 구술을 받아, 다산의 제자 李가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현장 분위기를 적확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유형
논문
학문분야
역사 > 인물
생산연도
2009
저자명
김정기
소장처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조회
22
첨부파일
탐라문화34호(김정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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