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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조천지역의 근대 민족운동 형태의 변화과정

분야별정보 > 역사 > 항일운동



탐라문화 제67호

 

지금까지의 4⋅3 연구는 4⋅3을 1947년 전후부터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로 시간을 한정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단절된시기 구분은 4⋅3 관련 인물, 특히 무장대 혹은 그들을 도왔거나 도왔다고여겨지는 인물들의 상황을 이해하거나 이전 행적을 고려하여 그 의도를 모색하려는 시도를 방해한다. 제주를 ‘평화와 상생의 섬’으로 한다는 긍정적 목적하에 많은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복합적 사안이 얽혀있는 4⋅3의 갈등과 비극성을 덮고, 단순히 누가 피해자인지를 밝히는 데만 매몰되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에서는 제주도의 조선 말기⋅일제강점기 민족항일운동이 해방 직후의 정치 활동으로 연결되었고, 그들 중 일부가 4⋅3의 피해자가 되었던 점을 주목하였다. 특히 조천지역과 조천김씨(김해김씨 삼현파 이동문중)를 중심으로 검토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천김씨 집안을 중심으로 조천만세운동이 시작되었고, 이들 집안의 후손에게서 많은 수의 민족항일운동가가배출했다는 점이다. 둘째 김명식, 고순흠, 김문준 등의 조천지역 출신 활동가들이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각기 제주도의 초창기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교육운동, 노동운동에서 두각을 보이고 많은 제주 청년들에게 영향력을 끼친 점이다. 셋째, 1920년대 이후 제주청년동맹 조천지부의 활동이 제주 전역 가운데서도 두드러졌고, 소년운동, 여성 계몽운동, 신좌(조천)소비조합을 중심으로 소비조합운동 전개와 신좌문고 운영, 노동야학이 활발히 실시되었으며, 일제 경찰들이 이들을 주시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1947년 3⋅1 발포사건이 일어난 후 읍면별 항의 집회⋅시위 상황을 살펴보면 장 먼저 가두시위가 시작되었고, 조천면의 시위행렬의 참석인원이 2,000~3,000명에 이른다는 점, 그리고 조천중학원 교사들과 조천 출신 활동가들이 4⋅3 당시 군경들에 의해 특별히 표적이 되었던 점이다. 이를 위해 조천김씨 집안을 중심으로 인물들의 사회운동 형태를 세대별로 구분해 보았다. 연구내용은 다음과 같다. 2장에서는 조천만세운동 등 제주의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일제강점기 조천지역의 민족항일운동의 연원을조선 말기의 제주도 유림의 사상적 특징에서 찾아보았다. 3장에서는 조선 말기의 조천지역 유림의 후손과 제자들을 분석함으로써 유림의 사상이 후세대로 어떻게 연결되고, 변화되었는지를 검토하였다. 4장에서는 조천김씨가를중심으로 친인척관계의 인물들을 검토하여 1920년대~미 군정기의 조천지역활동가들의 활동 동향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이 지역의 저항적 성격이 조선 말기의 유림의 학맥, 조천만세운동, 일제강점기 학교설립운동, 일본에서의노동운동들로 연결됨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조천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저항운동의 기반사상이 유교에서 사회주의로 바뀌고, 주체가 유림에서 근대학문을 수학한 청년지식인들로 바뀌었지만아들과 손자에게로, 스승에서 제자에게로 민족정신의 맥락은 끊어지지 않고이어졌다. 물론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항일운동과 4⋅3의 관련성을 설명하기위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지금까지 4⋅3의 발생 원인을 주로 해방 후부터 주목했던 것에서, 조선 말기 유림의 민족정신, 일제강점기 제주와 일본에서의 저항운동이 4⋅3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보는 것도, 4⋅3 무장대의 다양한 스펙트럼의 정치적 선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유형
논문
학문분야
역사 > 항일운동
생산연도
2021
저자명
신소연
소장처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조회
29
첨부파일
KCI_FI00274420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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