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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학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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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려 정씨 열려비(남원읍 한남리)

분야별정보 > 역사 > 기타



열녀정씨(烈女鄭氏)의 비(碑)

이 비는 조선 세종 때부터 한남리 원님로 길가에 세워져 있던 것인데 2006년에 한남리 복지회관 마당 한 곳에 옮겨 세웠다. 열녀 정씨는 고려시대 직원(職員) 석곡리보개(石谷里甫介)의 아내였다. 석곡리보개(石谷里甫介)는 조선시대 각종 문헌에 석나리보개(石那里甫介) 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고려 함적의 난 때 지아비가 죽자 평생 절개를 지켰고 그 사실이 정의현 지역은 물론 제주 전역에 알려졌다. 세종 10년(1428)에 열녀 칭호를 받았고 이에 열녀 정씨를 기리기 위해 그 행적을 비에 새겨 세우고 열녀문도 세웠다. 세월이 흐르면서 열녀문이 없어지고 비도 마멸되었다. 조선 순조 34년(1834)에 목사 한응호가 빗돌을 마련하고 비문을 새겨 다시 세워 놓았다. 

 

열녀 정씨의 비

고려 석곡리보개의 아내이다. 함적의 난 때 그 남편이 죽었는데 정씨의 나이가 어린데다 자식이 없었다. 얼굴과 자태가 고와 안무사와 군관들이 강제로 아내로 맞이하려고 하였다. 정씨는 스스로 죽기로 맹세하면서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베려 하자 마침내 아내로 맞이하지 못했다. 늙어 죽을 때까지 시집가지 않았다.

 

목사한공

여러 곳에서 보고 들어 남아있는 옛 유적을 손질하여 고치노라.

그 은혜가 아닌 게 없는데다 또한 자식이 없는 것이 괴롭고 불쌍하도다.

특별히 후량(後糧)을 내리셔서 돌로 만든 비석을 고쳐서 새롭게 세우노라.

도광14년(1834년 순조 34년) 3월일

유형
사진
학문분야
역사 > 기타
생산연도
2020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21
첨부파일
IMG_370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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