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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성과

제주학연구센터의 연구성과를 알려드립니다.

[뉴스원] 초가집 날아갈까 형제들이 모두 매달려 태풍 사라의 '악몽'

  • 2025-09-15
  • 조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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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news1.kr/local/jeju/5911412

한가위 악몽 만든 태풍의 대명사 '사라'를 기억하시나요
제주서만 사상자 137명…60년 지나도 태풍의 대명사

2025. 9. 14. 뉴스원(고동명 기자)

 

 故 홍성흠 선생이 촬영한 사라 태풍 당시 모습(제주학연구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뉴스1

故 홍성흠 선생이 촬영한 사라 태풍 당시 모습(제주학연구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뉴스1

 

(제주=뉴스1) 고동명 기자 = "태풍 전야제가 조용했지. 밤 열두 시 돼 가니까 바람이 건들건들하고 먹구름이 그냥 새까맣게 구름이 나오고 해서 빗발 뚝뚝뚝하기 시작한 것이 그냥 그때부터 불기 시작해 가는 거야"

 

1939년생 고모씨는 사라호 태풍이 오기 전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제주학연구센터가 2024년 발간한 제주학총서 72호 '다시 만나는 사라호 태풍'에는 당시의 상황을 고(故) 홍성흠 선생이 남긴 피해 사진 17점을 비롯해 제주신보 신문자료, 구술자료 등이 담겨있다.

 

1959년 제14회 태풍 사라호는 그해 9월12일 발생해 9월 17일 우리나라를 통과했다. 매미, 나리 등 역대급 태풍들이 덮친 이후에도 여전히 사라호는 그 시절을 직접 겪은 세대들에게 태풍의 대명사로 남아있다.

 

제주학연구센터는 "나이 든 어른들에게 잊지 못한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일제강점기, 4·3 사건, 6·25전쟁 등 근현대사의 아픈 기억과 함께 빼놓지 않고 들려주는 이야기가 태풍 사라호"라고 소개했다.

 

사라는 1959년 추석 전날인 9월16일 밤부터 추석날 아침 7시까지 제주 전역을 휩쓸었다.

"늘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은 그해만큼은 쓸 수 없게 됐다.

악몽의 한가위가 돼버린 그해 가을

사라는 순간 최대풍속 초속 33.5m로 제주 북동쪽으로 북상하며 239㎜ 가량의 폭우를 쏟아부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사망자 11명을 포함해 사상자는 137명 가옥 피해 1만4721동, 선박 피해 333척 등 32억5276만5345환(현재 531억 원)에 달하는 피해액을 기록했다. 사라는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사망자가 849명에 달했다. 재산 피해액은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5조4700억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故 홍성흠 선생이 촬영한 사라 태풍 당시 모습(제주학연구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뉴스1

故 홍성흠 선생이 촬영한 사라 태풍 당시 모습(제주학연구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뉴스1

 

현재도 이 정도 규모의 태풍이 닥치면 피해가 클 텐데 재해 대비가 지금 같지 않았던 60여년 전 도민들은 말 그대로 속수무책 고스란히 태풍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9월16일 추석 전날까지만 해도 지금의 기상청인 국립중앙관상대와 제주측후소는 태풍이 명절 성묘와 별지장이 없겠다고 예보했었기 때문에 도민들은 별다른 대책도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제주신보'의 추석 당일 아침 기사에는 "날이 궂어 달맞이 놀이가 걱정"이라는 수준의 내용만 있었다.

 

그러나 태풍이 휩쓴 다음 날인 18일자 신문에는 '26년만에 맹위를 떨친 태풍'으로 반전됐다.

 

다음은 '제주신보'의 기사 중 일부다

'한 아름의 나무를 뿌리째 뽑는 무서운 위력을 가진 태풍은 본도 일대에 걸쳐 인명 가옥 선박 농작물 등에 막심한 피해를 주었으나 전신선이 두절되고 그 위에 피해의 범위가 엄청나게 넓기 때문에 17일 하오 현재까지도 그 윤곽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기사에는 탑동 바다에 시체가 떠 있는데도 물살이 강해 건질 수 없었다는 비참한 장면도 실렸다.

 

사라호는 가을 태풍의 무서움을 일깨웠다. 태풍하면 여름을 떠올리지만 우리나라에 큰 피해를 준 태풍은 대부분 가을 태풍이다.

 

2007년 9월 11호 태풍 나리, 2016년 10월 제18호 태풍 차바 등이 있고 가장 최근에는 2022년 9월 11호 태풍 힌남노가 꼽힌다.

 

  故 홍성흠 선생이 촬영한 사라 태풍 당시 모습(제주학연구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뉴스1…

故 홍성흠 선생이 촬영한 사라 태풍 당시 모습(제주학연구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뉴스1…

 

태풍의 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해수면의 온도가 평균적으로 가장 높은 시기가 바로 9~10월인 데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면서 북태평양 기단의 세력이 약해져 태풍이 한반도로 향하는 길이 열리다고 한다.

 

연구센터가 태풍을 겪은 노인들에게 들은 구술 자료에서는 당시의 처참한 모습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사라호 당시 13살이었던 고모씨는 "마구 방안으로 비가 쏟아져서 어디 갈 데가 없으니 이불있는 벽장 위에 올라가 앉아 무서워서 떨었다"고 떠올렸다.

 

우도면에 거주하던 1941년생 김모씨는 "파도가 얼마나 강했냐하면 지미봉(구좌읍에 있는 오름)안 보일 정도로 파도가 쳤다"고 증언했다.

 

1937년생 김정자씨는 "우리집이 조그마한 초가집인데 처마가 들썩거리니까 바람에 불릴까봐 형제들이 다 매달렸다"고 했다.

 

누구하나 힘들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전국 각지에서는 피해를 본 제주도민들을 향한 온정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중 하나를 소개하면 '제주신보' 기사에는 '군 복무 중이던 홍모 병장이 푼푼이 모은 1만환의 환금증서와 위언서신을 신문사로 보내왔다'는 내용이 있다. 홍 병장은 서한에서 "극히 적은 돈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제대할 때까지 다달이 받는 봉급을 계속해서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제주연구학센터는 "사라호는 60여년이 지났지만 도민들 가슴 속에는 현재형으로 남아있다"며 "우리가 다시 사라호를 소환한 이유"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