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민일보] [제민포럼] 디지털 시대의 판화, 오리지널과 복제
- 2025-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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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1. 19. 김연숙 비상임 논설위원·화가
지난달 열린 제주판화가협회전 〈오리지널 & 디지털 - 제주 판화의 어제와 오늘〉은 "디지털 시대에 오리지널 판화란 무엇인가, 복제물과는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불러냈다. 과거에는 오리지널 판화의 기준이 비교적 명확했다. 작가가 직접 판(목판·동판·석판·실크스크린 등)을 제작하고, 그 판을 이용해 인쇄한 에디션이 작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1961년 미국 Print Council of America가 발표한 '오리지널 프린트 성명서'는 이러한 개념을 더욱 정교하게 정리했다. 작가가 판을 직접 제작하고, 인쇄 과정에 개입하며, 한정된 에디션 안에서 서명한 인쇄물만을 오리지널로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이 정의는 지금도 국제 미술시장에서 기본 규범으로 통한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의 확산 이후 상황은 복잡해졌다. 회화를 촬영하거나 스캔해 고해상도로 출력한 뒤 에디션 번호와 사인을 적는 방식이 늘어나면서, 이를 오리지널 판화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국제 기준에서 회화 이미지를 디지털로 출력한 작품은 '복제판화(Reproduction Print)'로 분류된다. 판화의 핵심은 '새로운 판을 만들고, 그 판을 통해 이미지를 찍어낸다'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스캔한 이미지를 출력한 작품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지라도, 창작 과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원작 회화의 재현물로 본다.
그렇다고 디지털 프린트가 모두 복제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미지를 처음부터 디지털 환경에서 창작하고, 작가가 인쇄 과정까지 통제하며, 제한된 에디션에 서명한 경우는 '디지털 오리지널 판화(Digital Original Print)'로 인정된다. 중요한 것은 기법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를 처음 창작한 출발점, 그리고 작가의 개입 범위다.
관객과 수집가가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작가가 이미지를 직접 창작했는가? 판(plate)을 직접 제작했는가? 인쇄 과정이 작가의 통제 아래 있는가? 에디션이 제한되어 있는가? 작가가 서명했는가? 이 조건들을 충족할 때 '오리지널'로 분류할 수 있다. 반대로 기존 회화나 이미지를 스캔해 출력한 작품은 에디션 번호가 있어도 '희소성을 부여한 복제물'일 뿐이다. 작가 서명이 있다고 해서 판화를 구성하는 창작 과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화질로 출력된 회화 작품을 복제물로 명확히 인식하는 일은 원본 회화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며, 동시에 판화가 가진 오리지널의 영역을 보호하는 길이기도 하다. 결국 디지털이라는 도구가 판화의 오리지널성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 과정이 얼마나 투명하게 작동하느냐가 관건이다.
이번 제주판화가협회전은 디지털의 물결 속에서 전통판화와 디지털판화가 공존하는 흐름을 한 자리에서 보여주며 관객에게 비교의 경험을 제공했다. 전통 판화의 물성, 디지털 프린트의 새로운 가능성, 사진과 판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들은 판화라는 장르가 어떤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 시사했다. 기술이 전통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하게 해준 자리였다.
디지털 시대의 판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결국 한 가지로 귀결된다. 예술은 여전히 인간의 손에서 출발하며, 창작의 흔적은 형태가 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 사실을 정확히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오리지널'의 의미가 명확해지고, 판화의 미래 또한 더 단단한 방향으로 열릴 것이다.